6. 프랭크 스튜어트

image

브리지 전문가이며 브리지 컬럼니스트 및 작가로 유명한

프랭크 스튜어트의 대한민국 브리지대표 경험담

1968년, 나는 미군의 '권유'로 대한민국에 있었다. 한국에는 서울에 단 하나뿐인 브리지 클럽이 있었고, 매년 이 클럽은 극동 오픈 챔피언십에 팀을 파견했다. 이 팀의 핵심 인물은 칼 밀러라는 훌륭한 사람이었다. 그는 미국인이었지만 귀화한 한국 시민으로 한국은행에서 일했다. 그는 한국인 아들을 입양했다. 또한 밀러 씨는 원예학자이자 보존전문가로서 뛰어난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1968년 ‘한국’ 팀은 밀러, 한국에 거주하던 헨리크 라우(1967년 버뮤다 볼에서 태국 팀의 NPC였던 인물), 그리고 한국에 주둔 중이던 미군 소속 두 명의 미국인, 캔자스 주 위치타 출신 래리 리처드슨과 현재는 캘리포니아 주 베이커스필드에 거주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이라 코헨이었다. 래리와 이라는 모두 진정한 전문가였으며, 이라는 4팀만 참가하는 미국 팀 트라이얼에서 경기를 치렀다.

나는 별다른 이유 없이 휴가를 받을 수 있었고 참가할 의향이 있었기 때문에 다섯 번째 선수가 되었다. 이 대회는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렸다. 다른 팀원들은 상용 항공편을 이용했지만, 나는 그렇게 할 여유가 없었다. 나는 군사 공수 수송대(MATS)를 이용해 오키나와로, 그 후 펜앙 공군 기지로 갔고, 거기서 방콕까지 택시로 90마일을 이동한 후 쿠알라룸푸르로 가는 상용 항공편을 이용했다. (돌아올 때도 같은 방법을 사용했다.)

말레이시아의 모든 것은 엄청나게 비쌌다. 도착했을 때 몸 상태가 좋지 않았고, 호텔은 내 방으로 의사를 보냈다. 그 비용이 얼마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회복하여 몇 경기를 치렀지만 거의 재앙과 같았다. 나는 게임에 대해 거의 모르고 있었으며, 빌려 읽은 몇 권의 ‘브리지 월드’와 몇 권의 기본 책에서 읽은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여기에 호주 팀과 대결하게 되었는데, 그 팀에는 위대한 팀 세레스가 포함되어 있었고, 1969년 버뮤다 볼에서 2등을 한 대만 팀과도 맞붙었다. (호주는 1968년 극동 대회에서 대만을 꺾고 우승했으나 세계 챔피언십에는 참가하지 못했다.)

대회는 더블 라운드 로빈이었고, 어떤 기적으로 한국은 호주를 두 번이나 이겼다. 나는 한 판에서 내 파트너가 1H로 오픈하고, 내 오른쪽에 있던 세레스가 3S로 응답했을 때를 기억한다. 두 번의 패스 후, 내 파트너는 4D로 재오픈했다. 나는 xxx,Ax,Kxxx,xxxx와 같은 카드를 가지고 있었고, 젊은 패기로 6D를 콜했다. 계약은 성공했고, 관중들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나는 한국이 5위나 6위를 차지했다고 믿는다. 내가 그 토너먼트를 54년의 경험을 가지고 했다면 우리가 얼마나 더 잘할 수 있었을지 종종 궁금해진다. 한국이 그 이벤트에서 우승하고 세계 챔피언십에 진출할 수 있었을까?

image

프랭크 스튜어트는 북미에서 가장 저명한 브리지 작가이자 저널리스트 중 한 명으로, 20권 이상의 책을 썼습니다. Official Encyclopedia of Bridge의 주요 기고자이자 ACBL Bulletin의 정기 기고가인 그는 오늘날 전국적으로 신디케이트된 'Daily Bridge Club' 일간 신문 칼럼의 저자로 가장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앨라배마주 파예트에 살고 있습니다.

image
image
image

위에 소개한 서울에 단 하나뿐인 브리지 클럽이 장충동 서울클럽 그리고 천리포 수목원을 만든 칼스 밀러(민병갈)씨 이야기도 하네요.

천리포 수목원 설립자 소개 링크

http://www.chollipo.org http://www.chollipo.orghttp://www.chollipo.org http://www.chollipo.org

image

정영애 글/이수아 그림 민병갈, 파란 눈의 나무 할아버지 - 예스24정영애 글/이수아 그림 민병갈, 파란 눈의 나무 할아버지 - 예스24